네 온 여든 하나. 미국 개기일식 여행 8월 16일 - 40시간이 되어 버린 하루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시작하는 미국 개기일식 여행기!
위의 위성사진에 내가 찍혀 있음!! ㅎㅎ

호텔 바우처니 e 티켓이니 벼락치기로 뽑다가 뜻하지 않게 프린터 잉크가 바닥나서 하는 수 없이 pdf 파일로 다운받고 어쩌고 정신없이 보내느라 거의 잠을 못잤는데 설상가상으로 다른 건 다 준비해 놨으면서 유심칩 주문을 깜빡 잊어버려 급히 주문하니 당일 공항 픽업이 안 된다고... 그래서 아침부터 강남역까지 찾으러 갔다. 그런데...

돌아와서 집에 가는 마을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엉뚱한 곳까지 한참 달려가는 사태가... 하이고... 어째 첫날부터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게 영 심상치 않다... 이번 여행도 영 고행이 될듯... 뭐 다 좋으니 개기일식 당일만 성공하면 된다, 그런 주문을 외우며 잠 못자 지친 몸을 끌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자니 새삼스럽다. 중국으로 개기일식을 보러 갔다온지 벌써 8년이 지났다. 또 다시 감행할 수 있을까 싶었던 미친 짓을 다시 한 번, 비교도 안 되게 먼 곳까지 하러 간다.

간단히 면세점에 가서 주문해둔 면세품을 찾고 어쩌고 하다 보니 언제 떠나나 싶었던 저녁 출발 시간이 다가왔지만... 항공기 정비 문제로 출발 연기... 결국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하여간 이날 하루 탔던 모든 교통수단이, 공항 셔틀 버스만 빼고는 죄다 말썽을 일으켰다. 일부러 준비해 놓은 것마냥...

기다리면서 대기중인 탑승객들을 보자니 환승객 반, 고향으로 돌아가는 미국인 반, 뭐 그 정도로 파악된다. 시애틀이 환승의 요지라는 건 이번에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다. 뭐 결국 나도 환승객이니까. 그래도 하루의 여유가 있으니 충분히 시애틀을 맛볼수 있으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알차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마침내 비행기에 올라 이륙한다. 이제부터 날짜 변경선을 넘어, 16시간 전으로 가게 된다. 24시간에 16시간을 더하니, 오늘 2017년 8월 16일 하루는 내게 40시간으로 체감될 것이다. 돌아올 때는 반대로 하루가 형편없이 쪼그라들겠지... 지구가 선사하는 시간의 마술을 맛보러 출발!

불편한 좌석에서 잠들기는 애초 글렀고, 못 봤던 기내상영 최신작이나 실컷 때리다 보면 도착하겠지 싶어서 영화만 봤다. <더 파운더>라고 맥도날드 창업주의 비열하다면 비열하다 할 수 있을 창업 비화를 다룬 영화랑 <미스 슬론>, 그리고 또 한 편은 기억이 안 나는군. <미스 슬론>은 영화 자체도 흥미진진했지만, 더빙판 연기를 어찌나 잘 하던지, 나름 성덕을 자부하는 편인데 주연을 연기한 성우 소연님의 연기가 대박이었다. 기내상영 더빙판은 굉장히 제작 환경이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대사도 많은 저 배역을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해 내다니 대박... 기내에서만 상영되고 일반에 공개되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와... 나중에 원판을 보게 되면 차 여신 연기가 오히려 어색할 거 같아...

밥 두 번 먹고 재우는 시간에 영화 때리고, 가급적 화장실은 덜 가기로 마음먹고 참고 참고 또 참고... 그러다 보니 태평양을 횡단하던 비행기는 지구의 밤 구역을 지나 낮 구역으로 진입해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시애틀 도착 시간은 오후 1시쯤. 밝아지고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이런 장거리 비행은 터키 이후로 두번째지만, 지나고 나면 그 지긋지긋했던 시간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무료하게 변함없는 실내에 앉아 있는 게 고작인 상황이니 뭐 드라마틱한 요소가 전무하고... 봤던 영화만 기억날 뿐... 그나마도 한 편은 기억 안나...

어쨌든 그렇게 날아 날아 마침내 시애틀 상공에 도착했다. 시애틀 다운타운 내려다 보기...
워낙 멀어서 시애틀의 상징인 스페이스 니들은 찾지도 못하겟네...
흠... 보이는 것도 같고...
착륙할 공항이 보인다... 우리를 다시 한 번 죽어라 죽어라 했던 장소...

입국이 까다롭다는 미국이니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영어로 예상 답안을 준비하며 그럭저럭 착륙... 그런데 게이트가 만석이라 다가가질 못하고 시간을 잡아 먹는 중...

시애틀 시내 관광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 오후가 다인데 이런 사단이... 한국 시간으로 오전 5시... 벌써 몇 시간째 깨어 있는지 감도 안 오는 몽롱한 머릿속이 그저 초조하기만 하다... 마침내 자리가 나서 공항에 발을 디디긴 했지만...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기나긴 대기줄...

미국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났다. 온갖 색깔의 여권을 손에 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서 있다. 나름 장관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전 세계인이 입국하려 애쓰는 나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시애틀도 나름 교민이 산다더니, 대기열을 안내하는 직원이 교민인 것 같았다. 어떻게 아냐고? 영어로 안내하는 와중에 쓰는 한국어가 아주 분명한 발음이었으니까. 한국어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물어봤으면 곧잘 대답해 줬을 듯...

줄어들 줄은 결국 줄어들게 되어 있다. 입국 심사는 간단했다. 대기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을 뿐...

입국 목적은? 관광입니다. 체류 기간은? 2주 정도?

입국 심사장을 빠져 나와서도 대기열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입국이 빡세다더니 2차 입국 심사라도 하는 거야? 관광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만 가고 있다...

수 백명이 움직이지 못하게 발을 묶은 원흉은, 알고 보니 공항내 셔틀 트램의 고장이었다. 심사장을 빠져 나오면 짐을 찾아 셔틀을 타고 로비까지 가는 게 유일한 이동 수단인데 그 유일한 이동 수단이 올스톱 되고 말았으니... 하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왜 하필 오늘...

그렇게 한 시간도 넘게 발이 묶여 있다가 마침내 로비에 발을 들이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어차피 호텔은 공항 근처, 그런데 너무 지쳐서 찾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도 발을 옮긴다...

여행 다니다 보면 지도에 속는 경우가 허다한데, 뭐 이번에는... 속은 거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워낙 바로 옆이라 쉽게 찾긴 했지만 지~인짜 멀었다. 공항이 너무 큰 게 죄지... 딱히 호텔까지 갈 이동 수단도 없었으니 지도에 속았다고 원망하기도 뭣하다...

캐리어를 부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서울 시간으로는 밤을 지나 아침이 밝아올 무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시내 관광에 나서야 한다. 이렇게 버티고 나면 가장 큰 장점은, 시차고 뭐고 없이 바로 다음날 현지 시간에 적응할 수 있다는 거다.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지니까. 이들의 밤은 나의 밤이며 이들의 낮도 나의 낮이 되는 것이다 ㅎㅎㅎ.

뭐 아무튼, 편리하게도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시애틀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비로소 미국 땅에 발붙이고 나서 감상하는 미국의 풍경. 첫인상은 당연하게도, 자동차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모든 장소에 거대한 주차장이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다운타운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 밖으로 나와 보니, 부산 못지 않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방향을 몰라 헤매다가 단순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바닷가로 갈 거니 내려가면 간단하잖아?

그렇게 내려가다 보니 마침내 바닷가가 나왔다. 시간은 이미 저녁 무렵.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적지는, 관광객 모드는 정말 싫지만 유명한 <더 크랩 팟>이라는 해산물 요리점. 남들 다 가는 코스를 따라가는 걸 죽어라 싫어하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지만, 짧은 일정으로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저녁만 먹고 바로 돌아가야 한다. 낯선 도시의 길거리에서 밤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대기 명단이 어마어마... 이래서 관광객 모드는 싫다니까... 일단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리면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식탁 위를 살펴보자니, 영 게살이 시원치가 않다. 자고로 여름 게는 살이 없으니 먹는 게 아니라는 게 어머니와 나의 결론... 떠올려 보면 여름에 게 요리를 먹은 기억이 없다. 전부 늦가을에서 겨울 무렵이었지...

그래서 쿨하게 포기하고 바로 옆의 음식점으로 가서 굴 튀김이랑 새우 튀김을 시켰다. 미국에서의 첫 식사, 그리고 첫 팁의 압박...

가이드북에서 본 대로, 영수증에 팁을 적어넣는 곳이 있었다. 역시 가이드 북에서 본대로 대충 15퍼센트를 계산해서 적어넣고 노천 자리로 가 앉았다. 15퍼센트나 되는 팁을 지불했는데도 직원이 한 일은 음식을 가져다 준 것뿐... 짐작은 했었지만 이때부터 팁을 피하려는 우리의 눈물겨운 노력은 시작되었으니...

그냥 튀김, 맛없는 기름에 튀긴 그냥 튀김이었다. 앞으로 보름동안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암담해 하는 어머니에게 예고를 했다. 뭐 양 하나는 미국답게 푸짐하더군... 결국 다 못 먹고 포장해서 일어선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대관람차를 타고 시애틀 시내를 훑어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낯선 곳에서 밤을 맞이하게 된 어머니는 노심초사, 결국 우리는 한 것도 없이 곧바로 호텔로 되돌아가야 했다.
밤이 오는 시애틀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반가운 건물 하나...
시애틀의 가장 오래 된 마천루 스미스 타워다. 1914년 준공... 이 사진이 시애틀 시내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워낙 처음 온 곳인지라 길 찾기 바빠서 사진 찍을 정신도 없었으니...

그나마 가이드북에서 본 명소를 하나라도 본 것에 감사하며 다시 우리가 내렸던 지하철역까지 왔다. 그런데 돌아가야 하는 반대방향 승강장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거리를 헤매다가 구글 지도를 추리하여 등 뒤를 본 순간 입구가 똬악!! 미치도록 허무한 순간이었다...

어쨌든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간다. 내릴 역 이름을 확인하는데 누군가가 도와줄까요? 물어본다. 미국 여행 내내 겪은 일이지만, 미국인들은 도움에 인색하지 않다. 딱히 친절하다고 할 순 없지만,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도와줄까요? 라고 묻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난다. 좋은 사람들... 고맙지만 단지 내릴 역을 확인한 것뿐이라고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하는 가운데, 도와주겠다고 한 사람이 그 뭐지, 요즘 유행하는 뱅뱅 돌리는 거, 그걸 돌리다가 떨어뜨렸는데, 구르긴 했지만 딱히 내가 줍기도 애매하고 그 사람 손이 닿는 위치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헤이, 왜 보고만 있어요? 하고 웃고는 자기가 주웠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었다. 좋은 사람들...

그 사람은 우리보다 먼저 내리면서 다시 한번 웃으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과의 이런 따뜻한 순간들이 여행의 즐거움이다...

그렇게 어두운 밤길을 지하철은 달리고, 우리는 도착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의 호텔 앞 거리를 걸어 돌아왔다. 배는 부르고, 내일의 출발을 위해 씻고 눕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40시간으로 증폭된 잊지 못할 하루가 저물어간다...

내일은 2시간 시차가 있는 세인트 루이스로 향한다. 증폭되었던 16시간 중 2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내일 하루는 22시간이 되겠군...

by 다크초콜릿 | 2017/11/05 01:49 | 개기일식을 보러 가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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