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온 여든 일곱. <콜럼버스>

이것도 본 지 꽤 된 영화인데, 쓰는 김에 작성해 본다.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안 쓰고 있는 작년 미국 개기일식 여행기에 나중에 쓸 생각이지만(도대체 언제??), 건축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근처에 간 김에(물론 근처는 아니지만, 미국 기준에서는 가까운 거리니까) 시카고까지 방문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의 도시를 실컷 즐기고 왔다.

바로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건축 전공자가 봐도 즐거울 것 같기도 하고.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눈이 즐거운 작품이다.

인구 4만 정도의 중소 도시지만, 이 도시에서 창업한 Cummins라는 기업의 창업주가 도시 주민에게 기여하기 위해 당대 유명한 거장 건축가들에게 의뢰하여 도시 곳곳에 지은 현대 건축의 걸작들이 즐비한, 인디애나 주의 도시 이름이 바로 영화 제목이다.

라디오 영화 소개 코너에서 듣는 순간 이건 바로 나를 위한 영화야!! 직감하고 가까운 상영관을 검색해 보러 갔다.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콜럼버스를 방문중 쓰러진 건축학 교수 아버지를 찾아온 한 남자와, 어머니와 단둘이 콜럼버스에 사는 한 여자의 우연한 만남과 교감을 잔잔하게 그렸다.

당연히 두 사람이 교감하는 과정에서 이 도시의 수많은 현대 건축물들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멋진 건축물들을 탁월하게 담아낸 덕에 오히려 진주인공인 건축물 사이를 두 남녀가 배회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 건 아니다. 건축학 교수의 아들인 남자와, 건축에 대한 열렬한 열정을 품고 있는 여자가 건축물을 보며 자신이 느낀 걸 말하는 정도? 나머지는 그저 보고 느낄 수 있을 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역시나 영화도 건축도 인간의 예술인지라,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은 바로 두 남녀의 교감 장면에서 탄생한다.

한 건축물 앞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이 도시에서 자기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건물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이 건축물의 연혁을 공부한대로 읋어댄다. 미국 최초의 현대적인 은행 건물이고 등등... 그러자 남자가 여자를 제지한다. 관광 가이드처럼 말하지 말고, 본인이 왜 이 건물을 좋아하는지를 말해 보라고. 미국 최초의 현대적인 은행 건물이라 좋아하는 건 아니지? 하고.

여자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자신이 왜 이 건물을 좋아하는지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건물 안에서 유리벽을 통해 여자를 관찰한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여자는 손짓까지 동원해 가며 수줍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털어놓는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내 개인적으로, 예술에 대해 영화가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여자가 왜 이 건물을 좋아하는지, 독순술을 익히지 않는 다음에야 우리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상상하면서 다시 한 번 차분히 이 건물을, 그리고 콜럼버스라는 도시의 건축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장면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마법이고 힘이다.

사진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시선을 잃지 않는 멋진 영화다. 꼭 가 보고 싶은 건축의 메카가 또 한 곳 생겼다. 가 보지 못한다 해도, 그 곳에 가고 싶을 때 다시 감상하고 싶은 영화다.

<건축학 개론>이, 뭐 어차피 제목부터 개론이니까... 아무튼 기대와는 달리 건축에 대해 별로 다루지 않았던 아쉬움을 달래주는, 보기 드문 건축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영화다.

by 다크초콜릿 | 2018/08/08 23:40 | 개인적인 생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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