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곱. 노르웨이의 숲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s>의 뜻이 '노르웨이제 (목재)가구'(60년대 당시에 영국에는 노르웨이제 가구가 유행했다는 얘기가 있다)라는 것은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런 걸 태연하게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을 해 버렸으니... 그러고 보면 하루키의 영어 실력도 적어도 이 소설을 쓸 무렵에는 별로였던 게 틀림없다. 지금이야 <위대한 개츠비>도 번역한다지만... 노래 가사를 조금만 음미해 봐도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하루키가 이 노래의 제목을 노르웨이제 가구라고 생각했다면 이 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노르웨이제 가구와 노르웨이의 숲은 같은 나무인데도 그 풍기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니까.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어딘지 싸늘하고 쓸쓸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노래 제목에 감정이입을 해서 쓴 소설이 틀림없다.
하루키를 전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은 가끔 읽는다. 소설 속 주인공 와타나베가 가끔 <위대한 개츠비>를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 것처럼, 나도 책장에 꽂혀 있는 게 눈에 띌 때면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는다. 워낙 두꺼운 책이기 때문에 이것도 꽤 좋은 방법이다. 워낙 분량이 많은 소설이라서 때로는 내가 여길 읽었었나, 가물가물한 대목도 있다.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 이 소설만 읽는 이유? 약간 엇박자 비슷한 리듬이 펼쳐지는 게 신기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게 느껴져서 가끔 읽게 된다.

어느날 문득, 그 엇박자의 이유를 알았다.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면회하러 요양원에 갔을 때, 나오코의 룸메이트 레이코 여사에게서 이틀 밤에 걸쳐서 기나긴 그녀의 사연을 듣는다. 이 대목에서 막강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이야기가 무려 수십 페이지를 차지한다. 레이코의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중간에 펼쳐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레이코는 나중에 와타나베와 관계를 맺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사연이 이렇게 길게 펼쳐지는 건, 내 생각엔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쓰다 보니 길어지긴 했는데, 막상 버리려고 보니 어느 한 부분 버릴 대목이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실제로 몰입해서 읽다 보면 이 대목은 술술 잘 넘어가는 편이다. 그만큼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빠져 나와서 돌아보는 순간, 내가 뭘 읽은 거지? 뭐가 이렇게 쓸데없이 길었어? 하고 정신이 든다. 하지만 그 대목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레이코 여사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잘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고. 이런 묘한 엇박자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얘기를 가지고 이렇게 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랍긴 하다. 자세히 보면,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은 1969년의 가을이다. 정확하게는 가을학기가 개강해서 미도리를 만났을 때부터 미도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미도리를 잠깐 만나 하룻밤 요란하게 노는 대목까지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에 한 술 더 떠서, 중간에 기나긴 레이코의 얘기까지 끼어드는 것이다. 그 앞뒤를 차지하는 부분에서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를 보면, 정말 대단히 파격적인 리듬감을 가진 작품이다. 이렇게 긴 소설이 줄곧 재미있다는 것도 놀라운 점이고.(사실 1970년 봄부터 나오코가 죽고 난 다음엔 지루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용서가 될 만한 분량이다)

그리고 이건 뭐 개인적인 소감이긴 한데, 1970년을 다룬 대목에서 오사카 만국박람회 얘기가 전혀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물론 1970년을 다룬 모든 작품이 만박을 다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건 뭐랄까,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식의 완벽한 부정이랄까. 1970년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린 듯한 인상마저 준다. 그렇게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역사적 사건이 철저하게 제거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 기간 동안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방황을 했으니 당연히 이해가 가지만, 이 소설의 필치는 그런 점에서 내게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다. 하긴, 전공투 세대에 대해서도 짧은 언급(그것도 몹시 부정적인)으로 그칠 정도니까. 동시대의 일본에 대한 하루키의 완벽한 무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도대체 이 소설을 좋게 읽은 거냐고? 좋게 읽지 않았다면 가끔 가다 다시 읽을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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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크초콜릿 | 2007/04/03 01:16 | 책 이야기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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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4/03 01:24
무라카미하루끼.
뭐가 대단한지 잘 모르겠음에도 어느샌가 그의 신작이 손에 들려있게끔 하는 작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 위대한 개츠비를, 어둠의 저편을 읽으면 알파빌을 보도록 만드는 작가.
도쿄기담집을 읽으면 혼자 커피숍에서 재즈를 들으며 독서를 해야할 것처럼 만드는 작가.
Commented by 나무피리 at 2007/04/03 02:09
트랙백 보고 건너왔어요. ^^;;;
예전글인데 이렇게 읽혀지니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구요^^

마지막 줄에 무척 공감이 되네요.
저도 종종 꺼내 읽곤 해요. 읽을때마다 다른 느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구요.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7/04/03 03:58
ArborDay님/그러시군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하루키를 끊은 케이스라서... (아마 상실의 시대랑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은 후일 겁니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만큼은 인상깊게 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리뷰도 쓴 것이구요. 제 개인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가 도대체 어떤 노랜지 알게 해 주었다는 인연이 있습니다.

나무피리 님/나오코는 여성들이, 미도리는 남성들이 호감을 보이더군요. 님은 나오코에서 미도리로 호감이 이동한 경우로군요. 남성들의 미도리에 대한 호감은, 그런 여자가 있어 주었으면 하는 판타지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도리는 남자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니까요...^^; 좀 이기적인 것 같지만 사실이랍니다...^^
Commented by 돼지콜레라 at 2007/04/03 09:26
확실히 중간의 그 요양소 들리는 부분이 엄청나게 길기는 했죠. 생각해보면 '양을 쫓는 모험'도 전체적인 균형이 위태위태했던 것 같습니다. 정작 '양을 쫓는 모험' 그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7/04/03 14:26
돼지콜레라 님/그렇다면 전반적인 하루키의 글 쓰는 스타일이 그런 모양이군요. 더 이상은 관심을 가지고 읽는 작가가 아니라서 그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작품을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님의 말을 참고하는 정도로 끝내야겠습니다...^^
Commented by 대뫄왕 at 2009/08/30 17:47
하루키는 위대한 불완전성 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완전성을 보임니다.
그 불완전성의 음미가 이제 이십년이 다 되어가네요. 하루키를 읽기위해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학창시절 좋아했던 대중가수의 신곡에 마흔이 된 지금도 설레이는 것처럼, 분명 한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느낌이 있는 작가가 제겐 하루끼입니다.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9/08/31 20:42
하루키가 님에게 그런 작가라니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그런 작가를 한 명 쯤은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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