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예순 여섯.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한국어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을 쓴 한 과학자가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 걸 접하고, 기분이 씁쓸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면에서 주장을 한 것으로, 영어 문헌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과학계의 현실면에서 공감할 수 밖에 없고, 또 내가 학계에 있는 건 아니지만 쓸만하다 싶은 책은 전부 영어나 일본어로 되어 있었던 경험도 있으니 대략 끄덕여져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말을 쓰자, 라는 식의 맹목적인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한국어가 얼마나 연약하고 사라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세상의 언어들은 어족으로 거칠게 묶어 분류할 수 있다. 인도-유럽 어족이라든가 중국-티벳 어족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 어족 아래로 다시 친족 관계에 따라 여러 번 소분류를 한다. 그렇게 분류를 하고 난 최하위에 영어, 독일어 등의 개별 언어가 자리잡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어는? 한국어는 어족으로 분류할 수 없다. 언어학적 용어로 language isolate, 조심스럽게 번역하자면 고립언어이다. 친족 관계인 언어가 없다는 뜻이다.

먼 옛날, 한국어의 뿌리가 되었던 어족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한국어와 친족 관계인 언어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수한 언어들은 오늘날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바로 한국어 하나 뿐이다.

한국어가 소멸한다면, 해당 어족의 언어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사라져 버린 한국어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가 하나라도 살아남아 있어야 그 형태를 유추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영어를 통해 독일어를 유추하는 식으로.

아니, 이런 거창한 얘기를 할 것도 없이, 현재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고립언어로 분류된 40종의 언어들 중 몇 가지를 나열해 보겠다.

아이누어, Abinomn, Andoque, Gilyak, Leco, Tol...

아이누어를 제외하고 이 중에서 들어본 적 있는 언어가 있는가? 나는 없다. 이 언어들 중 상당수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아이누어도 사라지고 있다. 한국어가 처한 운명이 이들 언어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7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걱정 없다고? 그나마도 남북으로 나뉘어서 점점 서로 이질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게 한국어이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전 유럽을 지배하며 유럽인의 세계관을 지배했던 라틴어의 현재 운명을 보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게 언어의 미래이다.

언어라는 게 워낙 추상적인 개념이라서 사라지고 나면 복원할 방법이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뿌리와 친척을 모두 잃어버리고 홀로 살아남아 위태롭게 견디고 있는 한국어를 보면 애처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세상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생성되서 소멸하는 게 언어의 숙명이라면 한국어만 특별하게 애처로울 건 없겠지만, 먼 훗날, 사라진 다음에 기억될 방법이 없는 유일무이한 언어라는 사실이 마음을 짠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40종의 고립언어 중 사용인구가 10만명을 넘는 언어는 한국어가 유일하다.
한국어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특별하게 살아남아 널리 퍼진, 특이하고도 유일무이한 케이스이다. 그렇다고 다른 39종의 고립언어와 다른 길을 걸어가리라는 보장도 없는, 그냥 하나의 외로운 언어일 뿐이다.

언어란 게, 보호하려고 한다고 보호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외로움을 기억해 주는 게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자의 예의나 배려, 뭐 그런 거 아닐까?

by 다크초콜릿 | 2007/07/16 15:27 | 개인적인 생각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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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쥬알라 at 2007/07/30 05:12

제목 :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어를 쓴다.
온 예순 여섯.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한국어 다크초콜릿님 블로그에서 트랙픽.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어를 쓴다. 우리나라의 '말'은 어떤 언어에도 얽매이지 않은 우리고유의 언어이다. 알타이어계라고 알려져있던것도 사실은 유사성이 없다는것으로 판명이 나있는걸로 나는 알고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쓰는 한국어. 우리가 쓰지 않으면 바로 죽어버릴 언어라는게 한국어다. 내가 아무리 외국에서 10년넘게 떠돌면서 살면서 영어를 말하고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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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예순 여섯.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한국어 다크초콜릿님 블로그에서 트랙픽.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어를 쓴다. 우리나라의 '말'은 어떤 언어에도 얽매이지 않은 우리고유의 언어이다. ... more

Commented by 날씨좋다 at 2007/07/16 16:56
.......음..... 한국어 데이터베이스라도 만들어야겠군요. 발음, 뜻 등을 영어든, 중국어든, 프랑스어든 간에 기록을 해놔야...
Commented by Mizar at 2007/07/16 17:04
길약어(Gilyak)는 한국어와도 친연관계가 있는 언어라고 하더군요..
Commented by 민트 at 2007/07/16 20:07
고등학교때까진 한국어가 국어교과서에 나온대로 알타이어족인가...? 그런걸로 믿고 잇었는데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인가 보니까 한국어는 어느 언어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언어다라는 위에 언급하신 내용과 비슷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어릴때부터 철저하게 영어를 교육시켜 영어가 능통한 동남아 친구들을 보면 느끼는게 자국어가 약한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는 아예 알파벳을 문자로 쓰고 필리핀도 스페인어와 영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영어 공용화나 경쟁력 강화도 좋은데 저는 한글을 지키자쪽 입장입니다. 영어 광풍이 좀 심한 듯 해서요.. 한국은..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7/07/18 20:10
날씨좋다님//기록을 해 놔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언어란 게 워낙 추상적인 거라서요. ^^

Mizar님//길약어를 아시는 분이 있다니... 놀랍군요. ^^ 말씀하신 걸 보고 알아보니,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고 하는 아무르 강 유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건 맞지만, 언어학적으로는 친연관계가 아니라 각자 고립언어로 분류하는군요. 아마 사용지역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트님//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더 놀랍더군요. 사실 영어 공용화의 선택 여부는 편리함이냐 원칙 고수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번역이 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어 배우기는 너무 힘들거든요. ^^;
Commented by 카시아파 at 2007/07/22 01:39
좋은 글이라 링크합니다. ^^
Commented by gaya at 2007/07/22 02:20
말하시는 바에 극구 동감합니다. 고립어일뿐만 아니라 국력이 따라주지 못하니 자꾸만 더 취약해지는 한게 현실입니다.
단지 아주 가깝지는 않다해도 일본어와는 근연관계가 좀 있는게 아닌지 궁금하네요.. 어순이나 조사의 존재 등을 보면..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7/07/23 22:49
카시아파님//좋은 글이라 생각하신다니 고맙습니다. ^^

gaya님//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말의 위상이라는 게 점점 취약해지고 있지요. 저도 일본어를 공부한 적이 있어서 근연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언어학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일본어를 배워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한자 어휘를 제외하고는 서로 비슷한 어휘가 별로 없으니까요. ^^
Commented by 로페 at 2007/07/30 04:56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외국에 살면서 생각하는것은 한국어는 꼭 지켜야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아이덴티티와 같은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영어를 배우는것은 다른 나라들과 소통하기를 위함인데, 그것때문에 우리의 언어를 없애버린다는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없애는것이라고 생각되네요. 트랙백해갈께요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7/07/30 11:11
로페님//그렇습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없애가면서까지 다른 나라들과 소통하려고 과잉 반응을 보일 필요가 과연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곤 합니다... ^^
Commented by 1346677108 at 2009/09/1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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