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일흔 다섯. 스쳐 지나가는 것과 머무는 것

금요일 심야에 하는 <W>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사실 비참한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너무 쉽게 감정이입이 되어 견딜 수 없어지기 때문에, 병원 프로그램이나 <순간 포착> 같은 프로그램은 피해 다니는 편이다.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재빨리 채널을 바꾼다.

그런데도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이유는, 시청하는 동안 괴롭긴 하지만, 어쨌든 접하지 못했던 해외 여러 국가들의 생각지도 못했던 이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얻는 게 많다는 호기심이 더 앞서기 때문이다.
비참한 현실만 다루는 것은 아니고, 시사 프로그램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기 때문에 지식 충족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도 어쨌든,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는, 가난한 나라에서 고통받는 약자들의 현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가 주무대가 되는 셈이다. 즉 배낭여행객들의 인기여행지들이 곧잘 등장하는 것인데, 배낭 여행객들이 찬양을 늘어놓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에 혼란을 느끼곤 한다.

물론 양자간의 목적도 시각도 정반대이긴 하다. 여행과 시사비판이 같은 노선을 달릴 순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 해도 너무나 다른 시각차는, 의문을 낳게 된다.

결국 배낭 여행객도 여행객에 불과한 건가, 하는.

터키를 여행할 당시, 귀찮을 정도로 잦은 공공기관 건물의 엑스레이 검색만 제외하면 재미있고 환상적이었다. 중급 호텔에 머무르면서도 나름 배낭 여행을 추구했기 때문에 직접 모든 걸 해결하느라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터키를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온통 쿠르드 족 문제가 빠지질 않는다. 쿠르드 족의 테러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각이다. 하지만, 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엑스레이 검색을 하다 엉뚱하게 걸린 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테러 위협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여행객이 느끼는 현실감각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젠가는 그 곳을 떠날 몸이니, 현실이 현실이 아닌 것이다. 혹 그 곳의 현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롭다 해도, 곧 여길 떠날 텐데, 뭐, 하고 마냥 참을 수 있게 되고, 떠나 오고 나서는 망각의 늪에 파묻혀 그 괴로웠던 기억마저도 아름답게 윤색되는, 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면도 있긴 하다.
꼭 극심한 테러나 전쟁 지역이 아닌 평화로운 지역이라 해도, 도대체 내일의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출연하곤 한다. 그들에게는 돈이 나올 방법도 전혀 없고, 푼돈으로는 도저히 밥 한끼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물가는 가혹하고, 간신히 몸만 눕힐 수 있는 곳을 집이라고 소개한다. 가족수는 엄청나고, 대부분이 노약자이다.
잔인한 생각이지만, 솔직히 취재진이 취재를 하러 갔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게 기적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화면으로만 보기에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뭘 먹고 살았던 것일까, 정말로 의문 아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취재진이 떠나올 때 가지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서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늘 들 정도이다.

하지만 화면으로만 접하는 내 편협한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그럭저럭 살아왔을 것이고, 굶주림이나 질병 등의 요인이 첩첩산중으로 앞을 가로막겠지만, 취재진이 감당할 수 없어서 돈을 보태주지 못하고 돌아왔어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게 비참하지만, 잔혹하지만, 현실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상상하기 싫어서 상상의 스위치를 내려버리고 마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현실인 것이다.

학교가 없어서, 교과서가 없어서, 교사가 없어서, 노천에서 수업을 받다시피 하는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꼭 이런 대답을 한다. '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싶어요.' 라고.
그들의 희망을 짓밟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서글픈 미소를 짓곤 한다.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없는 그들의 현실이 슬퍼서. 그들의 현실에서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 미래는 밝다 라는 생각을 하기에도 죄스럽다. 요즘 광고에도 나오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천사가 되는 기적이 발생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현실이 너무 괴롭다.

대표적인 인기 배낭 여행지는 인도이다. 비자 기한이 만료되기 직전까지 여행하다가 옆 나라로 가서 다시 비자를 갱신하고 다시 들어가 죽치고 앉는 여행자들이 흔하다.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라는 뜻이겠지만, 만약 인도인으로 살라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로 인도에 애정을 느껴서 받아들일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외국인으로서 매력을 느껴 머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방인들이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그 곳의 비참함은 너무나 뿌리 깊고, 해결 방법이 없다.

뭐 그런 식으로 배낭 여행을 하다가 현지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여기저기 현지에서 숙소나 식당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로망을 품은 적도 있긴 하지만, 나로서는 자신이 없다. 답이 안 나오는 현실 속에서 밥을 굶는 사람은 이 곳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게다가 밥을 굶을 걱정은 하지 않는 이 곳의 현실이 내게는 더 와 닿는다. 그것이 내가 이 곳에 머무는 이유이다.

그들은 어떤 계기로 현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멈추고 머무르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주는 매력? 하긴, 어떤 곳이라도 24시간 내내 비참하기만 한 곳은 없을 것이다. 더러는 괴롭고, 더러는 기분 좋고, 더러 웃음 지으며 행복감도 느껴지는... 어떤 곳이라도 다 같을 것이다.

이 곳에 살면서 비참한 사람들의 현실이 늘 머릿속에 머무는 건 아니듯, 그 곳에서도 늘 비참한 사람들의 현실에 눈길이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 자기 앞가림 하기 바쁠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가난한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지낸다는 것은 현지인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유리한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좀 더 많이 그 곳의 매력에 눈을 뜨고 머무는 것 아닐까.

지긋지긋한 이 곳의 현실에 지쳐서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외국인으로서의 이점을 누리며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이들도 점점 늘고 있는 걸 보면,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그들은 이 곳에서 도대체 어떤 매력을 발견한 것일까. 사람들이 주는 매력이라고, 이 곳에서도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이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과 머무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현실은 어디나 괴로운데, 머무르려 하는 자는 그 곳의 매력을 발견할 것이고, 스쳐 지나가려 하는 자는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말 것이다.

매력을 발견했지만 머물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었던 나 같은 여행객은? 그냥 평범한 여행객일 뿐이겠지.

그 어떤 곳에서도 매력을 발견해 내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민폐를 끼치는 존재이기도 하겠지만, 어쩐지 멋진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진정으로 매력을 느껴 머물만한 곳이 과연 지구상에 있을까? 워낙 투덜이라서...^^;

by 다크초콜릿 | 2007/07/31 02:59 | 개인적인 생각 | 트랙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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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Orange Sun.. at 2009/08/27 03:21

제목 :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 인도의 류시화.
류시화씨에 대한 글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한참을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여행을 처음 결심할때쯤 읽었던 글로 대신합니다. 출처는 다음 카페 인도방랑기 의 지금은 삭제된 익명게시판. 그래서 저자는 밝히지 못하나 이 글이 제가, 그리고 많은 인도여행자들이 느끼는 류시화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을 죄다 끄집어 내어서 똑바로 꼬집어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내용이 조금 길지만 류시화씨의 글로 인도에 대한 환상을 가지......more

Commented by 귤곰 at 2009/08/27 03:21
이글루의 댓글보고 찾아왔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W는 저도 참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예요. 사실 여행이라는것도 저는 일상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특별한 일상이죠. 그렇기에 특별한 일들을 경험하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 또한 그럴지도 모르겠구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최소한의 윤리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배 여행자들의 일탈때문에 피해입는 후배여행자를 많이 보았고 제가 그 후배여행자라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글에서 말씀하신것처럼.. 저는 인도를 무척 좋아하지만 제가 인도에 살고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깝깝해집니다. 인도에 정착해서 살고 계시는 분들도 입을 모아 말씀 하시더라구요. 인도는 사랑하지만 이 문화에는 살면 살수록 더 적응하기 힘들다고. 그렇기에 결국 여행자는 여행자일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좀 더 피해가 가지 않고 그 문화를 존중하는 그런 여행을 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댓글이 조금 산으로 갔네요. 좋은 글 다시한번 잘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다크초콜릿 at 2009/08/27 22:30
여행자의 윤리... 정말로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 여행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사람이라면, 블로그에 여행기를 올리든 책을 내든, 누구나 명심하고 지켜야 할 철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현지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는 여행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상식적으로도, 문화적 차이라는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불성실함과 마주치면 화가 날 때도 있지요... ^^; 사람이다 보니까...

일부러 찾아와서 서툰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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